조선은 유교이념 하에 농업을 근본으로 건국된 국가입니다.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상업을 통제하며 농업을 적극적으로 권하면서 신뢰하기 어려운 화폐보다는 쌀, 면포와 같은 실제 물건들을 교환하면서 실질 가치가 있는 물품 화폐를 사용하였습니다. 조선후기 이전까지 화폐 정책이 지속성을 갖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의지가 없었기에 상업을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아 금속 화폐가 잘 유통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상품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아 금속 화폐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조선후기에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물품 화폐보다 효율적인 화폐가 필요해지게 되면서 금속 화폐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상품 유통에 관심을 보이고 활발하도록 권하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래 군량이 부족해지면서 조선 조정에서 특산물을 쌀로 바치는 조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된 대동법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를 비롯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미곡으로 세수를 확보하게 되면서 특산물을 구매하는 상인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상인인 ‘공인’과 ‘시장’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세수로 확보한 미곡을 들고 물건을 사러 시장에 방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인조 4년(1626)에 미곡을 사용하였을 때의 단점과 금속 화폐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기록이 주목됩니다.
… 우리 나라에서 전화(錢貨)의 사용을 폐지한 지가 2백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돈이 뭐하는 물건이며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모른 나머지 입지도 먹지도 못하는 물건으로 여겨,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처음 사용할 때에는 통화량이 많지 않으므로 집이나 토지,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데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돈으로 술이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가 1전(錢)만 가지고 시장에 들어가면 곧바로 취하고 배부를 수 있게 되는 이익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르면서 돈을 사용하는 묘리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안에서 밖으로 확대 적용해 가면, 양식을 싸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고 곡물(穀物)을 흘려버리는 일도 없어 온 나라에 통행되는 화폐가 될 것이니, 여조(麗朝)에서 화폐를 통용시킬 때 먼저 주식점(酒食店)을 설치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
『인조실록』 권 13, 인조 4년 윤 6월 18일 무오
이 기록에서 조선에서는 금속 화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유통 시키는 방법, 미곡을 통한 물물 교환의 단점, 시장과 화폐의 장점을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점은 인조 11년(1633)에 일본으로부터 동전이 공물로 유입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다음해에는 3만 근의 동이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고 적고 있어, 원활히 동전이 주조되어 유통되기 전까지 일본의 동전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의 동전은 조선뿐 아니라 나카사키에 들어온 동인도회사에도 방대한 양이 수출되고 있었던 만큼 구리의 함량과 품질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내에 수요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음에도 조정의 금속 화폐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재정적 효과 때문이었습니다.

상평청이 설치되어 조선통보를 주조하고 동전 유통을 시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전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숙종 4년(1678) 허적의 제안으로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상평통보는 고종 대 근대 화폐가 발행되기 전까지 통용된 대표적인 화폐입니다. 상평통보의 ‘상평’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임말로 화폐의 가치를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등가’의 의도를 반영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개인들이 거래에서 특별히 사용할 수 있는 금속 화폐였는데, 재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제작단가는 낮고 동전의 가치는 높아야 했습니다.
17~18세기부터 금속 화폐의 주 재료인 구리를 값싸게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주전할 구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수입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구리 주요 수입국은 일본이었으며, 당시 청나라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함께 구리 구매를 위한 경쟁이 필요했습니다. 경쟁으로 인한 구리 가격 상승, 비용 증대로 인해 공급량이 부족해지는 등 조선은 구리 수입이 어려워지면 동전 부족으로 연결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전황(錢荒)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면포로 세납을 하는 등 다양한 정책들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금을 대체하는 방법은 화폐의 수요가 늘어난 조선후기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전 시 들어가는 비용 감소를 위해 구리를 줄이고자 다른 금속을 더 넣거나 만들고 남은 금속을 활용하는 등 노력했습니다. 이에 숙종 5년(1679) 구리의 함량이 90%대에서 점차 구리 함량이 줄어들어 60~70% 정도로 감소하였으며, 동전의 무게도 줄어들며 19세기에는 구 화폐보다 무게가 가볍고 구리함량도 적인 신화폐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고액권을 만들거나 은으로 구리 가격을 조정하는 등의 화폐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고려되는 등 조선에서 상평통보의 유통과 경제정책을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사이트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문헌
유현재, 「조선 후기 주전정책과 재정활용」,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권내현, 「17-18세기 조선의 화폐 유통과 은」, 『민족문화연구』 74,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유현재, 「상평통보의 주전이익과 활용」, 『한국문화』 7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7.
김영록, 「17-18세기 대일銅 무역과 정부의 주전사업」, 『지역과 역사』 43, 부경역사연구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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