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추천

[문화유산 추천] 신라, 천불의 현현을 바라다

(사)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 2023. 9. 22. 16:22

불교미술 중 비석형태로 앞면이나 네 면을 다듬은 돌에 불상과 상을 조성하게 된 기록을 남긴 것을 비상, 불비상, 조상비 등으로 부릅니다. 본 글에서는 불비상으로 부르고자 합니다. 중국에서는 북위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비상들이 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례가 매우 드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7개의 불비상이 1960년과 1961년 충청남도 세종시 서광암, 비암사, 연화사, 공주시 정안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중 4개의 불비상에는 '계유', '무인', '기축' 등의 간지명이 기재되어 있어 제작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7개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규모가 가장 크고 비상이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입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 673년, 높이 94cm,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549 (사진 출처 : 이뮤지엄)
 

1) 국보 <계유명삼존천불비상> 명문과 발원자의 성격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좌우측 하단에 4행씩 음각으로 하여 명문을 새겨 넣어 발원자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계유년 4월 15일에 향도가 석가 및 여러 불보살의 상을 만들어 돌에 기록하다. 이것은 국왕, 대신, 칠세부모 및 법계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향도 이름은 미차내 진모씨 대사, 상생 대사, □인차 대사, □선 대사, 찬불 소사, 이사 소사, □□□ 소사, □□ 등 250인이다.

歲癸未年四月十五日香徒釋迦及諸佛菩薩像造石記
是者爲國王大臣及七世父母法界衆生故敬造之
香徒各彌次乃眞牟氏大舍上生大舍□仁次大舍□宣大舍贊不小舍貳使小舍□□□小舍□□等二百五十(人)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의 하단 명문 부분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여러 불상들을 조성하였으며 그 이유로는 '향도(香徒)'가 국왕, 대신, 칠세부모 및 범계의 모든 중생을 위함이라고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불상 조성에 주체가 된 향도는 특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성된 집단으로 불상의 명문에서 등장하는 향도는 불교의 교리를 수행하며 불상 조성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의 향도의 성격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진모씨 대사, 상생 대사, □인차 대사, □선 대사, 찬불 소사, 이사 소사, □□□ 소사로 등장하는 인물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누군가인가를 앞서 당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 시킨 후 나당 전쟁이 한창 중이었던 시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신라는 어느 때 보다 내부의 결속이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문무왕 1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경위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 나마는 백제의 은솔, 대사는 백제의 덕솔, 사지는 백제의 한솔, 당은 백제의 나솔, 대오는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은 백제의 달솔, 선간은 백제의 은솔, 상간은 백제의 덕솔, 간은 백제의 한솔, 일벌은 백제의 나솔, 일척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文武王十三年, 以百濟來人授內外官, 其位次視在本國官銜. 京官: 大奈麻本達率, 奈麻本恩率, 大舍本德率, 舍知本扞率, 幢本奈率, 大烏本將德. 外官: 貴干本達率, 選干本恩率, 上干本德率, 干本扞率, 一伐本奈率, 一尺本將德.

『삼국사기』 권40 잡지(雜誌) 제9

위의 기록처럼 673년 계유년은 문무왕이 신라의 관등을 지닌 백제 유민들에게 신라의 경위(京位)를 부여한 해로 백제의 유민들을 포섭하기 위한 신라의 정책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의 사비 지역에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시작한 시기로 이때 세종 지역에서 제작된 것이 <계유명삼존천불비상>외 6점의 불비상입니다.

다시 돌아와 불비상 7점이 발견된 지역이 기존 백제의 영토 안이었던 점과 세종시 인근에서 발견된 불비상에 등장하는 성씨들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총 7점의 불비상에서는 전씨(全氏), 진씨(眞氏), 모씨(牟氏), 진무(眞武)와 목구목(木口目) 등의 성씨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중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서는 진모씨(眞牟氏)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금석문, 문헌 연구를 통해 알려진 백제의 성씨는 다음과 같습니다.

扶餘, 沙(沙乇․砂宅․沙宅․沙吒), 木劦(木刕․木羅), 國, 眞(眞牟․眞慕), 解, 苩, 燕, 昆解, 鬼室, 憶禮, 東城, 谷那, 四比, 答㶱, 汶休, 古爾, 黑齒, 姬, 段, 王, 馬, 吉, 丁, 賈, 高, 鄭, 趙, 古爾, 難, 禰
출처
李弘稙, 百濟人名考 , 『한국고대사의 연구』, 신구문화사, 1971, 333~360쪽.
李道學, 「'禰寔進墓誌銘'을 통해 본 百濟 禰氏 家門」, 『전통문화논총』 5, 2007; 『백제 사 비성시대 연구』, 일지사, 2010, 306쪽

<계유명삼존천불비상>에 등장하는 진모씨(眞牟氏)는 미차내(彌次乃)라는 지역에서 활동한 '향도'에 속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헌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진모씨는 귀족 혹은 왕족과 관련된 성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진씨(眞氏)는 백제의 대성 8족 중 하나로 웅진성의 북쪽인 연기 지역에 거주하였던 성씨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리고 모씨(牟氏)의 경우 문주왕과 동성왕의 이름으로 쓰이고도 있는데, 이들은 본래 진모씨(眞牟氏)였다가 진씨와 모씨로 분지되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이러한 백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문무왕의 정책에 따라 신라 경위 관등인 대사(12위), 소사(13위)에 국한되어있는데, 백제의 관직으로는 달솔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명문에 등장한 사람들은 백제의 귀족이었다가 백제가 멸망 후 신라에 포섭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를 토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기리고자 했던 왕과 대신은 맥락 상 백제를 가리키기보다는 신라의 왕과 대신으로 백제 지역의 민심 포섭에 선두에 있었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2) 세종지역 불교 사상과 국보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671년 신라가 사비성에 소부리성을 설치하고 인근 지역에 위치한 가림성을 공격한 672년 다음해에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나당 전쟁이 이루어진 시기로 신라의 내부적 결속이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세워진 사찰과 조성된 불비상은 불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기본적으로 명문에서 등장하는 바와 같이 백제의 고위 귀족 뿐 아니라 세종 인근 지역의 백제 유민들까지 포함하여 불비상, 사찰 조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불비상 중 명문을 살펴보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과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은 '미차내'라는 동일 지역에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중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불교를 통해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내세지향적 신앙요소가 강한 아미타신앙의 신앙적 형태는 잘 이해가 됩니다. 한편, 크게 유행했던 아미타 신앙 외에 동일시기 천불신앙의 불상도 같이 조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천불은 곧 다양한 부처가 현실에 상주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데 명문에서 두 불비상이 목적을 달리 했었을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좌 좌 : <계유명삼존천불비상>, 673년, 높이 94cm,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549(사진 출처 : 이뮤지엄)

우 우: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불비상>, 673년, 높이 94cm,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550-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국왕·대신 및 7세부모와 함령(含靈)을 위하여 발원하여 삼가 절을 지었다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왕, 대신, 칠세부모 및 법계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삼가 만든 것이다.

 

두 불비상에서 나타난 발원 목적에서 천불비상이 일체 중생을 위한 발원으로 그 폭을 넓히고 있으며 '향도'라는 신라적 요소를 밝히고 있는 점에서 천불상의 목적이 더욱 두드러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라 입장에서 옛 백제가 새로운 신라로 탈바꿈하였음을 보이고 신라지배체제 하에 융화되어야 하는 신라의 정치적 목적을 드러낸 조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의 조성과 <계유명삼존천불비상>의 조성에서 인력의 동원 정도가 전자는 50명, 후자는 250명으로 5배가 차이가 나고 있으며, '지식'이란 단어와 '향도'라는 단어 뒤에 조성자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성과정에서 후원자의 세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즉 아미타는 백제 유민세력의 주도하에 천불비상은 신라의 주도 하에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아미타신앙이 유행하는 과정에서 동일 지역에서 현세로 나투하는 천불사상을 활용함은 불교 신앙을 대중으로 확산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는 신라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국립중앙박물관

정은우, 「연기 불비상과 충남지역의 백제계 불상」, 『백제문화』 32,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03.

이도학, 「세종시 일원 불비상의 조상 목적과 백제 성씨」, 『한국학연구』 56,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길기태, 「673년 세종지역 불교신앙의 성격」, 『백제학보』 27, 백제학회,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