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 철화로 조선의 해학을 그리다.
1. 17세기 철화백자의 유행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쟁을 겪게 되면서 국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이 위기에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지속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백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조선 전기부터 왕실에서 사대부까지 크게 유행하였던 청화백자가 안료 수급 문제로 제작이 어려워졌는데, 의례에 필요한 각종 기물마저 생산할 수 없을 정도로 청화안료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는 기록이 확인되는데, 임란이후부터 청화안료가 부족하여 가화로 임시방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옹원에서 아뢰기를, “조정의 연향용 화준이 전쟁을 치른 후 하나도 남지 않아 청화안료를 구입하여 번조하려고 했습니다만 현재 사올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무릇 연향례가 있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가화를 사용하는 등 구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 현감 박우남이 화준 한쌍을 바치고 싶다고 하기에 그 뜻이 가상하여 살펴보았던니 두 화준은 뚜껑이 없고 하나는 주둥이에 틈이 벌어져 붙여놓기는 하였습니다만 술상의 분위기를 빛내줄 만하였습니다. ᄄᆞ라서 본원에 놔두고 뒷날의 용도에 대비케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司饔院啓曰: "朝家宴享所用畫樽, 自經亂後, 蕩無遺在, 每欲貿靑燔造, 而絶無貿易之路。 凡遇宴禮, 不得已假畫而用之, 事體殊甚苟簡。 今者前縣監朴䨞男, 將畫樽一雙願納, 其意可嘉。 看審則兩樽皆無蓋, 一樽之口, 雖有罅缺粘付, 而可賁酒亭, 留置本院, 以備他日之用宜當。
『光海君日記』 卷 127, 光海 10年 閏4月 3日
인조 16년(1638) 왕실 대례(大禮) 때는 주요 의례기로 사용되는 청화백자였던 화용준(畫龍樽)이 부족하고 제작도 여의치 않아 가화용준(假畫龍樽)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가화’ 역시 임시방편으로 의례기를 대신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왕실용 자기 제작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중 국내에서 쉽게 수급할 수 있는 안료를 찾게 됩니다. 정치, 경제, 외교 등의 문제로 수급이 어려운 청화 안료를 대신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2. 철화, 백자 안 조선의 해학을 그리다
17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철화백자는 청화백자의 위치를 대체하는 용도였기 때문에 문양과 기형역시 청화백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기록에서 의례용으로 사용하였던 용준이 부족하였다고 한 만큼 용이 시문된 철화백자를 자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외 대표적인 철화백자로는 국보 <백자철화매화죽문호>, <백자철화포도원숭이문호>가 있습니다.



청화백자를 대신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들이 등장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철화안료로 제작된 수많은 문양 중 어딘가 비율이 맞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것들이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문양이 나타난 것에는 철화안료가 갖는 특징에서 비롯됩니다. 청화안료와는 달리 철화안료는 잘 번지고 붓이 백자에서 잘 나가지 않아 농담 표현이 쉽지 않으며, 휘발성이 강한 안료여서 정성을 들인 문양이 번조과정에서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에 영조는 철화백자에 대해 “물력이 부족하여 비록 색이 일정치 않고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사대부의 검소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철화백자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남긴 것은 17세기 어려웠던 조선의 상황과 수요층에 대한 미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용
철화백자에서 가장 파격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단연 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례에서 사용하기 위해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했던 만큼 품질이 우수한 용문이 남아있는데, 이 용문 외에도 윤곽선만 간략하게 표현하거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용까지 그 범위가 매우 다양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철화백자용문호>를 보면 스카프를 둘러 고정시킨 듯한 용의 수염과 안경을 낀 모습, 과장된 몸짓은 파격적인 섬세하게 제작된 문양에 파격성을 보여줍니다. 이와 상반된 것으로 옛 만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대단히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2) 호랑이
용에서 보이는 모습이 호랑이에서도 확인됩니다. 16세기 말부터 전쟁으로 전 국토의 황폐화에 따라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호랑이와 야생동물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이전보다 호환이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가 증가했음에도 조선시대 <철화백자호로문호>에서 보이는 호랑이의 이미지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백자에 묘사된 이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가 아닌 다른 의미로 수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양들은 대체로 종속문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궁궐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그릇이 아닌 민간 혹은 사대부들이 주문해서 제작한 그릇이었을 가능성을 높입니다.
참고문헌
방병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 도자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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