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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운 - 괴로움을 잊고 성공을 자축하다

(사) 한국전통미술융합진흥원 2023. 4. 18. 16:58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과 일상을 담아 SNS에 게시하곤 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표현했을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현전하는 조선시대 인물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대운 기로연회도>를 살펴보면 당시 환국에서 승리한 남인의 수장 권대운(權大運, 1612-1699)의 모습과 함께 고사를 활용해 연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권대운 기로연회도>, 1690, 199x485cm, 서울대학교박물관, 법인 1

 

권대운의 기로연회도는 서울대학교에 1점, 국립중앙박물관에 1점이 소장되어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권대운 기로연회도>는 서울대학교 소장본과 비교했을 때 4폭, 5폭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대운의 저택에 모여있는 장면을 고전의 모티프들을 살려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모임이 열리게 된 이유에 대해 서울대학교 소장본에 서문이 적혀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내용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참여했던 사람인 이옥(李沃, 1641~1698)이 모임을 기념하여 「사로연회병서(四老宴會屛序)」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권대운 기로연회도>, 18세기, 139x60cm,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11415(출처 : 이뮤지엄)
<권대운 기로연회도>, 18세기, 139x60cm,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11596(출처 : 이뮤지엄)
숙종 15년(1689) 봄, 서인이 몰락하고 목내선, 이관징, 권대운, 오정위가 순서대로 복권되었다. 오늘날 그들은 관직은 경상(卿相)의 위치에, 나이는 각각 74세, 73세, 79세, 75세로 기로(耆老)의 자리에 오르니 아름답고 참되다. 하루는 권대운이 남산의 자택에 연회를 마련하여 함께 복권된 이들 및 그들의 자제 중 관직에 있는 이들을 모두 불러 모으니 총 9명이었다. 연회의 명칭은 남산의 별칭을 딴 ‘종남사로회(終南四老會)’라 칭했다. 연회 자리는 권대운과 목내선이 북쪽 상좌에, 그 아래로 오정위와 이관징이 동서로 앉았다. 자녀들은 모두 뒤에서 이들을 모셨다. 권대운과 목내선은 이렇게 다시 관직에 임명된 것은 하늘이 도운 것임을 밝히고, 이들 네 사람의 인연은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온 것임을 말했다. 또 이런 일이 후세에 모두 알려져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지 못하면 자식들의 불경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옥이 이에 동의하며 그간 네 기로의 노고에 대해 말하였다. 또 오늘의 모임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며, 비단 한 가문의 일이 아니라 국가의 경사임을 말했다. 이 기로회는 이전의 전례를 따라 모임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춤과 노래로서 기쁨을 표현함 을 밝혔다. 이옥은 잔을 들고 양상공에게 공덕을 기리고 장수를 바라며 노래했다. 또 공조판서 오정위의 충성과 믿음을 찬양했다. 연회 중 그림이 완성되었는데 오른쪽에 빈곳이 있었다. 여러 노인들이 이옥에게 글을 지으라 했으며, 공손하게 사양했으나 결국 서문을 남기니 이상과 같았다.

글에 따르면 권대운은 당나라 때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연 이도회(履道會)나 북송 때 문언박(文彥博, 1006~1097)이 주관하고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기록으로 남긴 진솔회(眞率會)와 같은 역사 속 유명한 기로회를 본받아 이 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모임의 이름은 ‘종남사로회(終南四老會)’, 즉 종남산 4명의 노인 모임이라 불렀습니다. 권대운, 목내선(睦來善, 1617~1704), 이관징(李觀徵, 1618~1695), 오정위(吳挺緯, 1616~1692) 모두 70세를 넘은 나이였고, 남산의 별칭이 종남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남산은 원래 중국 시안(西安) 근교에 위치한 산이기도 합니다. 왕유(王維, 699?~761?)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노래한 명승이며 종리권(鐘離權), 여동빈(呂洞賓) 등 신선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림의 분위기, 기록의 표현을 고려할 때 특정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로연회병서」에는 그 의도를 추정하게 끔 합니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실각했던 남인이 1689년 기사환국으로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책봉을 반대한 서인이 몰락시키고 정권을 잡게된 것입니다. 숙종은 권대운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해 기로대신(耆老大臣)으로 우대하였습니다. 권대운의 초대로 모인 네 명의 남인 노대신은 정치적 승리를 자축했던 것입니다. 연회에는 노대신의 아들 가운데 관직에 오른 권규(權珪, 1648~1722), 목임일(睦林一, 1646~?), 이옥(李沃, 1641~1698), 오시만(吳始萬, 1647~1700)과 권대운의 손자 권중경(權重經, 1658~1728)이 배석했습니다.

「사로연회병서」의 기록과 그림을 비교해 보면 마루 안쪽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목내선과 권대운이고 그 좌우가 이관징과 오정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 옆에 좌우로 늘어앉은 인물들이 각 대신의 아들이며, 가장 오른쪽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권중경입니다. 나이에 따라 마루높이를 달리하고 지위가 높을수록 관복의 색이 더 밝도록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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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운 초상>, 조선, 178x98cm, 서울대학교 박물관, 법인 2

화가는 기로연회도에 참석한 9명의 얼굴이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그렸습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기로연회도> , 서울대학교 <권대운 초상>과 비교해 보면 깊이 파인 눈두덩, 날카로운 콧날과 같은 개성이 잘 드러납니다. 원래 병풍의 제1폭에 「사로연회병서」, 제8폭에 좌목이 있었으므로 텍스트 만으로도 모임의 의의를 충분히 밝힐 수 있었음에도 참석자의 개성을 모두 표현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실제 공간을 왜곡하여 아홉 명을 평행하게 배치하지 않고, 늘어져 앉은 모습으로 그린 것도 참석자들의 앞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권대운은 일흔이 넘은 네 대신이 평생 정치적 부침을 함께했던 점을 강조하며 동료애와 임금의 은혜가 후대에 망각되지 않도록 자손들이 힘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화원을 불러 모임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이옥에게 그림의 서문을 쓰게 한 것은 되찾은 권세를 영원히 남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들의 소망대로 남인의 가장 빛나던 순간은 글과 그림으로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김경인, 「<權大運耆老宴會圖>를 통해 본 南人의 復興과 衰落 - 서울대학교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의 비교를 바탕으로 - 」, 『박물관학보』35, 한국박물관협회, 2018.

김지선, 「권대운기로연회도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0.

 

참고사이트

국립중앙박물관